3:56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본문

독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경제학과 학부생 2026. 1. 3. 23:29

 

알베르 카뮈 <이방인> 표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알베르 카뮈는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들 중 한 명이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부조리문학의 대표주자이기도 하다. (사실 이방인보다 <페스트>로 더 유명하다!)

 

책에는 크게 세 번의 죽음이 등장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줄거리 흐름(?)을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주인공 '뫼르소' 어머니의 죽음, 두 번째는 뫼르소가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살해한 것, 마지막으로 뫼르소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서 죽는 것이다.

 

사건 주요 내용
어머니의
죽음
<이방인>의 첫 문장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다.
해당 문장은 뫼르소가 사회 통념상 슬퍼해야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심지어 오늘인지 어제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모습을 묘사한다.
그 외에도 뫼르소는 장례식에서 밀크 커피를 마시고 맛이 좋다고 생각하거나, 쾌청한 날씨를 보며 엄마 일만 없었다면 산책하면서 즐거움을 만끽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해변에서의
아랍인 살인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은 사실 뫼르소와 아무 관계가 없는 타인이었다. (굳이 따지면 친구의 원수 정도의 관계였다.)
총도 함께 해변에 간 친구의 것이었고, 친구가 아랍인을 쏠까봐 말리기 위해 뫼르소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뫼르소는 혼자 해변을 산책하다 아랍인을 만나고 태양의 열기와 뜨거움, 아랍인의 칼에 비춰진 강렬한 빛 그리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으로 인해 우연히 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
사형 아랍인을 죽인 죄로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재판장에서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것에 대한 내용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은 사실이 훨씬 더 많이 언급된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으므로, 뫼르소는 비정상이며 그러므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묻는 일 없이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 당사자인 뫼르소가 철저히 배제된 채 진행되는 재판 중, 120~121p

 

뫼르소는 법정에서 아랍인을 죽인 이유에 대해 '햇빛이 눈부셔서'라고 답한다.

이는 꾸밈 없는 진실이었지만, 법정의 누구에게도 납득되지 못한다.

결국 재판은 당사자인 뫼르소를 철저이 배제한 상태에서 진행되어 버린다!

여기에서 책의 주제인 '부조리'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세상의 사건들은 우연히, 의미 없이 일어나지만 사회에서는 의미를 부여하고 필연적인 이유를 가져다 붙이려 한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사회적 통념을 거부하고 억지로 의미를 찾지 않는 뫼르소는 철저히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내 속에서 뭔가가 폭발해버렸다.
...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기도하지 말라고 말했다.
...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해.
...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 뫼르소가 회개와 기도를 강요하는 사제의 멱살을 잡고 이를 거부하며, 145p

 

위 장면은 <이방인>의 절정 부분이며, 소설 내에서 카뮈의 철학이 폭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뫼르소에게 사제는 하느님을 거론하며 죽은 뒤가 끝이 아니며, 뫼르소에게 기도를 하겠다고 말한다.

(사제는 이전에도 뫼르소를 귀찮게 한 전적이 있다.)

 

소설 내내  뫼르소는 말 수가 적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분량의 대부분은 뫼르소의 생각과 행동을 묘사하며, 대사 자체는 적다.

그러나 해당 장면에서 거의 연속으로 두 페이지 분량이 뫼르소의 대사로 쓰인다!

 

뫼르소의 입장에서 사제는 죽은 뒤의 삶(종교적 의미)에 매달리느라,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다.

반 뫼르소 자신은 사형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곧 죽는다' 라는 사실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내가 살고 있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
- 뫼르소가 회개와 기도를 강요하는 사제의 멱살을 잡고 이를 거부하며, 146p

 

사제는 뫼르소에게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냐", "신을 믿어야 한다"라며 자신이 올바른 삶이라 믿는 기준을 들이댄다.

그러나 뫼르소는 다소 허무주의적인 주장을 펴며 사제에게 반박한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삶이 더 우월한지 가치를 매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논리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  뫼르소가 사형 집행을 앞둔 시점에서 감옥의 창 너머로 불어오는 밤바람과 별빛을 마주하며, 147p

 

뫼르소는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는지, 왜 하느님을 믿지 않는지와 같은 비난과 강요를 받는다.

이들은 뫼르소의 행위 자체가 아닌 태도나 의미 부여 방식을 교정하려고 하며, 뫼르소는 이에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나 감옥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뫼르소는 세계를 '정다운 무관심'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 시점에서 뫼르소는 요양원에서의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요양원에서 뫼르소의 어머니는 새 친구를 사귀고 페레스 영감과 연애도 한다.

이러한 어머니에 대해 책의 초반부에서는 뫼르소가 다소 거리감을 느끼는 듯하게 묘사가 된다.

 

그러나 사형을 앞둔 뫼르소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의 '해방감'을 깨닫게 된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사회적 체면 등을 내려놓고, 현재를 가장 순수하게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뫼르소는 삶의 마지막 자유를 누린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모욕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곧 죽음을 앞둔 뫼르소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설은 내가 처형 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한다는 뫼르소의 독백으로 끝을 맺는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1) 2025.12.28